소화를 열다

김준호 레오 선생이 강냉이 가루 몇 되, 담요 석 장을 지닌 채 무등산에 오른 그 때가 1956년 3월, 가족들에게 전염될까 두려워 집에 돌아가지 못한 폐결핵 환자에게 움막을 쳐주겠다는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결심한 입산이었다.


선생은 동행한 걸인 소년 두 명과 폭포수 부근의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에 담요 한 장을 치고, 첫날밤을 맞이한다.

그날이 바로 오늘날 소화자매원의 시작이다.

"움막을 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주인공" 인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제중병원(현,기독병원)에 함께 입원해 있을 때 건네준 성녀 소화(小花)데레사의 시는 선생이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된다.

그는 갔어도 거할 곳 하나 없이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생수가 나는 곳마다 선생은 움막을 치기 시작했으며,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무등산 골짜기에는 80여명이 살 수 있는 큰 건물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1964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으로 이전, 정착하게 된다.

사랑을 살다!

사랑으로 죽는 것!
저의 희망 오직 이것 뿐!
그분 사랑의 불에
제 마음 타고 싶어라
그분과 함께 보고 싶어라.
언제나 또 언제나 살고 싶어라.
이는 저의 큰 기쁨!
사는 뜻이어라.
오! 사랑을 사는 것!

사랑을 살다

김준호 레오 선생의 생전 삶의 철학은 ‘작음과 가난’이었다.

소화를 위해 온 생을 내어 놓고도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은 가난이었으며, 오로지 기도로 삶을 산 은수자로서의 작음이었다.
이렇게 선생의 삶이 기초가 되어 이루어진 소화공동체는 제 몸에서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그 열매에서 떨어진 씨로 인해 다시 핀 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즉, 소화와 인연을 맺은 장애인, 직원, 봉사자, 후원자들이 함께 조화로운 소화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은 주인으로, 직원은 보조자로, 봉사자, 후원자는 협력자로서 각각의 위치에서 열매로 줄기로 잎으로 살아가고 있다.

선생의 삶의 정신을 이어, 소화공동체는 지금까지와 같이 각자의 역할을 아름답게 기능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따뜻한 손길로서의 공동체로 살아갈 것이다.

뒤돌아보면 60여년 세월을 소화공동체의 시작과 삶을 주관하시고, 앞으로의 길도 살피실 주님의 섭리에 감사드리며, 소화공동체를 돕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